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줄거리와 해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줄거리와 해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줄거리와 해석 그리고 핵심 용어들을 정리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3년에 출판한 책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줄거리와 해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해 배화교로 불리기도 합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를 중심으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는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 아들이 서로 경쟁하며 선과 악이 생겼습니다. 쌍둥이 중 스펜서 마이뉴(자애로운 영)는 선을 선택해 진리/정의/생명의 속성을 가집니다. 다른 아들인 앙그라 마이뉴(파괴의 영)는 악을 선택해 파괴, 불의, 죽음의 힘을 얻게 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세계가 대화재로 멸망하고 선의 추종자만이 새로운 창조에 동참하기 위해 부활한다고 합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과 투쟁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상은 기독교와 더불어 서양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부인하며 조로아스터교의 사상과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원한 독자는 모든 대중이 아닌 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 안주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자신에게 익숙한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실현할 용기가 있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옛 기준과 법칙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기준과 법칙을 찾아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위버멘쉬가 되라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성경의 잠언서처럼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 :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총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포함해 총 4부로 구성됐고 각 부에는 주제를 압축한 소제목들이 붙은 글들이 있습니다. 제가 읽고 있는 버전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진우 교수님이 번역했는데 잘 읽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각 부에 제목을 붙이기도 합니다. 1부-방랑자 차라투스트라의 출발, 2부 위버멘쉬를 찾아가는 여정, 3부 차라투스트라의 고난, 4부 출제의 밤과 새로 떠오르는 태양의 극적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줄거리

제1부 : 차라투스트라의 출발

차라투스트라는 두 동료 독수리와 뱀과 함께 산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다른 사람들에게 비출 때만 행복해지는 태양에서 영감을 받은 차라투스트라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기로 결심합니다. 산을 내려가다가 숲 속에서 만난 성인은 신을 찬양하며 살아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인이 아직 ” 신은 죽었다 “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는 줄타기 광대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에게 연설을 합니다. 그는 초인을 가르치고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설교합니다. 관중들은 이 설교를 경멸과 조롱으로 맞이하고 줄타기가 시작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 심연 위에 걸쳐진 받줄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줄타기 광대가 반쯤 건너고 있을 때, 두 번째 광대가 그의 뒤에서 나타나서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재촉합니다. 두 번째 광대가 첫 번째 광대를 뛰어넘자 첫번째 광대가 밧줄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그런 다음 광대는 로프 댄서를 뛰어넘어 후자를 넘어지게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광대의 시체를 숲으로 옮겨 속이 빈 나무에 눕힙니다. 그는 이때부터 더 이상 대중에게 말하지 않고 선택된 소수의 제자들(길동무들)에게만 말하겠다고 결심합니다

1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기독교 도덕의 많은 계율을 부수는 담론들을 제시하게 됩니다

제 2부 : 위버멘쉬를 찾아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자신이 살던 산의 동굴 속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멀리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밤 그는 어린아이가 든 거울 속에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아니라 악마의 찌푸린 얼굴과 조롱하는 웃음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합니다. 그는 이 현상이 적들에 의해 자신의 교리가 왜곡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잃어버린 제자(벗)들을 찾기 위해 행복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산으로 돌아가서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돌아갑니다
2부에서는 신의 죽음과 위버멘쉬의 부상이라는 주제를 발전시키고 힘에의 의지를 소개하는 글들이 이어집니다

제 3부 : 차라투스트라의 고난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발을 심연으로 끌어내리려는 반은 난쟁이고 반은 두더지의 모습을 한 중력의 영을 등에 지고 자신이 살던 산의 동굴로 돌아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에는 낙심하지만 나중에는 용기를 내서 중력의 영에게 도전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이 무한하며, 앞뒤로 영원으로 뻗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고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영원회귀를 의미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공포에 질린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입에 들어온 검은 뱀에 입이 막힌 목자의 환상을 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대가리를 물어뜯으라는 외침에 양치기는 뱀의 머리를 물어뜯고 뱉어냅니다. 그 순간, 양치기는 양치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변화한 사람이 되어 빛에 둘러싸여 웃습니다.
제 3부는 차라투스트라는 동굴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장면들을 관찰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산 동굴에 그는 인류의 하찮음을 미워하고 그런 하찮은 종족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에 절망합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영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제4부 : 축제의 밤과 새로 떠오르는 태양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동굴에서 혼자 늙어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예언자가 그를 방문합니다.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의 동정이라는 마지막 죄로 유혹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밖에서는 우월한 인간이 차라투스트라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월한 인간을 찾아 산을 내려가며 두 명의 왕, 마술사, 신을 잃은 마지막 교황, 스스로 거지가 된 사람,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를 만납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자신의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외침을 다시 듣습니다. 그는 그날 자신이 이야기한 모든 사람들이 우월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환영하면서도 그들이 그가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Übermensch 의 선구자일 뿐입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손님을 위한 만찬을 주최하는데, 손님들은 당나귀를 숭배하는 나귀교를 만듭니다. 우월한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삶에 만족하도록 가르친 차라투스트라에게 감사합니다.
다음 날 아침,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밖에서 사자와 비둘기 떼를 만납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자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신호로 해석됩니다. 높은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오자 사자가 그들에게 포효하여 소리 지르고 도망하게 합니다. 그들의 외침은 차라투스트라에게 그가 우월한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도록 유혹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예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끝났고 이제부터 자신의 일 외에는 생각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핵심 용어 정리

위버멘쉬(Übermensch)

Über는 over이고 mensch는 인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인간을 넘어선 사람이 위버멘쉬입니다. 넘어선다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적인 마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려는 자기기만적인 모습을 계속해서 극복해나가려는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 정신을 낙타, 사자, 어린이로 분류하는데 어린이의 정신이 바로 위버멘쉬입니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도 위버멘쉬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 인간 정신의 변신 단계 : 낙타 -> 사자 -> 어린이
낙타는 노예적 삶을 살며 주인에게 No라고 말하지 않는 성실함과 헌신을 가진다.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삶에 가혹한 고문을 하고 있다.
사자는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가진 동물이다. 낙타가 사자로 변신한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주인도 섬기지 않는다. 사자는 자신의 주인을 모두 물리치고 용으로 변신한 신과도 대적한다. 용은 사자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도덕과 법을 강요하지만 사자는 ‘나는 하고 싶다’라며 말한다. 이는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신뢰하겠다는 것이다. 자유를 이루기 위해서는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옮기는 변신을 겪어야 한다
사자는 용의 명령과 유혹을 거부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지만 용을 이기지는 못했다
사자는 싫어하는 것을 No라고 부정할 줄 알지만 삶을 긍정할 줄은 몰라 유쾌하고 즐겁지는 않다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우리는 춤을 출수도 웃을 수도 없고 하늘을 나는 용을 이길 수가 없다
– 어린아이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삶을 긍정하고 즐긴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재미와 놀이가 중요하고 양심의 가책이 없어 비도덕적인 존재다
사자에게 커다란 부정의 대상이었던 용도 어린아이에게는 웃음거리이고 장난감일 뿐이다
춤과 웃음 그리고 변신의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삶에 대한 긍정의 얼굴이다

형이상학적 이분법

서양 문명은 세계를 생성과 존재의 두 가지 틀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세계를 생성과 존재의 두 가지 틀로 나눠서 인식하고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는 거짓이고 이성으로 파악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실재라고 봅니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고대 철학자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불멸성에 대해 말하며 진리는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성만이 오로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되는 것만이 실재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라는 주장입니다. 우리의 눈, 코, 손 등 감각으로 파악되는 것을 이며 이성으로 파악되는 것만이 실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변하는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을 ‘생성’이라고 명명하고 거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서양 문명은 이렇게 세계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와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 속에 있는 무수한 사물인 ‘생성’으로 분리하고 ‘ 존재의 세계’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생성의 세계’는 쓸 모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생성, 즉 변화의 세계는 모순이 많고 인간의 인식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는 불확실성과 불안만을 가집니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생성과 반대되는 세계를 상상해내고 이를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재의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다양한 답을 줍니다. 플라톤과 교회와 사제들은 아직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저편의 세계(피안)는 고통과 무능력한 인간이 만들어낸 행복한 망상이라고 비판합니다.

힘에의 의지

니체는 서양문명의 기반인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망상이라고 비판하며 생성의 세계에 존재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인 힘에의 의지를 소개합니다. 힘에의 의지는 위버멘쉬와 기독교 비판, 영원 회귀 사상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니체는 변화야말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확실성이라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생명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무엇인가에 힘을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힘에의 의지를 권력 의지라고 번역했으나 현대 철학자들은 힘에의 의지로 번역합니다.

인간은 신과 같은 저 너머의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땅 위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혐오하게 됐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이 땅에서의 삶이 결백함을 입증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힘에의 의지란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 더 많은 힘을 얻기 원하고 ▲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고 ▲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세 가지 본성에만 복종합니다.

힘에의 의지들은 지배할 대상이 필요하기에 여럿이 존재합니다. 힘에의 의지들 간의 싸움이 우리의 인생 그 자체이고 이는 긍정해야 할 대상입니다. 니체는 계속해서 투쟁하고 더 많은 것을 정복하고 자기 자신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런 삶이 힘에의 의지의 본성에 충실하고 ‘고귀한 삶’이라는 주장입니다

중력의 영

이 세상과 삶을 무겁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을 중력의 영이라 부릅니다. 중력의 영은 도덕과 규칙으로 사람을 무겁게 내리 누르며 세상과 삶을 저주하게 만듭니다. 중력의 영은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 사람들을 날지 못하도록 합니다
중력의 영은 쉽게 포기하려는 마음, 새로운 도전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기존의 편안한 일상에 자리 잡고 있어 사람에게 친숙하고 편합니다
이 유혹에 굴복하면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새로워지지 못하고 고여서 썩어버립니다

영원회귀

영원회귀란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일련의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고 그런 세계의 모습 때문에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으로 모든 것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무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성’과 ‘힘에의 의지’밖에 없고 이런 ‘생성’과 힘에의 의지가 영원히 되돌아온다고 해석합니다
니체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삶이 끔찍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최고로 만들어야 혐오스럽고 덧없는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바꿀 수 있습니다
끝없이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 끝없이 자기를 극복해가는 사람, 그래서 아무도 지은 적 없는 웃음을 웃는 사람. 이렇게 영원회귀 사상을 허무주의에서 삶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는 사람을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부릅니다.

신과 천국

인간을 혐오하고 신을 사랑한 성자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기쁜 소식(복음)이라고 합니다. 신이 죽으면 천국에 대한 신앙도 사라져서 우리 스스로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개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부릅니다
니체가 분석한 신이라는 관념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완전한 존재를 동경해왔습니다. 이런 동경은 한편으로는 문명과 사상을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런 동경은 인간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낳는 부정적인 작용도 해왔습니다
완전한 존재라는 관념이 인간에 대한 혐오와 발신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완전한 존재인 신과 완전한 세계인 천국이라는 관념을 만들었습니다
니체는 신이라는 관념은 용기 없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 만든 허상이라고 봅니다
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신의 가치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 신을 살해한 자는 누구인가?
– 신이 불쌍히 여겼던 인간입니다. 신이 인간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죽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신의 연민이 수치심을 자극해 이를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불쌍히 여긴 신을 증오하고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신이 죽는다고 인간의 추함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추한 것으로 부정하는 인간은 다시 신을 살려냅니다. 니체는 신을 완벽히 죽이는 것은 웃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에게는 신이 필요 없기 때문에 신은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됩니다
– 신을 살해한 자는 교회와 사제들입니다. 교회와 사제들이 예수를 너무나 위대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교회와 사제들이 원래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가르침을 왜곡하고 예수가 비판했던 가치들로 무장했다고 비판합니다. 교회를 예수의 무덤으로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 니체가 생각한 예수는?
예수는 이스라엘 율법학자들이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신의 벌이라는 구조를 강조해 신과 인간의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신앙적인 삶을 중시하지 않고 평화, 적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구원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의 천국은 저 하늘이 아니라 사랑이 깃든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그 실천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마음의 천국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교회를 위협하는 예수를 못박아 죽였습니다. 기독교 역시 율법학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죽음 후 중세와 근세까지 교회와 사제들은 삶에 대한 사랑과 천국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일신과 독생자인 예수를 가르쳤습니다. 사랑을 통하는 구원 대신 불멸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통한 구원, 부활과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교리만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니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교회와 사제들이 신을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관점주의적 인식론

근대 철학은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을 어떻게 찾는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성을 중시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경험을 중시한 베이컨의 경험주의가 대표적인 인식론입니다. 니체는 모든 해석은 특정한 관점에 따라 나온 특정한 해석일 뿐이며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대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적극적이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의미와 가치 해석은 쓸모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식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우리의 삶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체와 이성

니체는 인간을 정신/이성 VS 신체로 나누는 것이 착각이라고 비판합니다
정신과 이성은 신체의 일부일 뿐입니다. 니체에게 신체는 이성과 육체와 의지를 모두 포함하는 통일적인 존재입니다

서구 문명의 가치 전복

니체는 과거의 서구문명이 가진 가치를 전복하려고 했습니다. 서구 문명의 전통적인 도덕은 그 자체로 선을 의미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니체는 보편적인 기준을 토대로 하는 도덕은 없으며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없는 지혜로운 자들이여.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일종으로서 너희들 의지의 전부다. 너희가 선과 악에 대해 그리고 가치평가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렇다. 너희에게 말하되 불변의 선과 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힘에의 의지가 선과 악의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임을 선언합니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을 데카당스 도덕이라 부릅니다. 데카당스란 원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예술주의를 말합니다. 데카당스 도덕은 삶을 부정하는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도덕입니다 기존의 도덕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세계를 바라보고 삶을 부정하며 가상의 천국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아온 세가지는 감각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이다 나는 이 셋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저울질하겠다고” 합니다

감각적 쾌락

서구문명은 감각적 쾌락을 억압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감각적 쾌락은 속물들에게는 자신을 태우는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이지만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천진난만하고 자유로운 것이며 지상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이자 미래가 온통 현재에 바치는 넘칠듯한 고마움이다”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가 아닌 육체와 정신이 함께하는 커다란 하나의 신체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육체와 그 육체가 누리는 감각적 쾌락을 부정한다면 인간 존재 전부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함 자신을 억압하는 자학행위입니다

이기심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타적인 행위도 크게 보면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기존의 도덕은 자기애를 버리고 남에게 헌신하는 것을 고귀하게 여겼습니다 니체는 고귀한 사람은 누구나 당당하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배욕

진정한 지배자인 강자는 약자가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켜 자신과 경쟁하기를 바랍니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은 니체가 이야기하는 지배욕과 다릅니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맹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개인들의 힘에의 의지들이 더 이상 경쟁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가볍게 만들어 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중력의 영때문에 사람들이 나는 법을 배우기가 어려워집니다. 이 비행술은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긍정의 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가진 선입관과 관습, 낡은 도덕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은 중력의 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알려준 비행술의 원칙은 1.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해야 합니다 2. 심각해지지 말고 웃는 법을 배운다.

비행술은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는 위버멘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리이며 변신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 자신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엄청난 고통의 사상인 영원회귀는 인간의 삶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이며 차라투스트라도 영원회귀 사상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영원 회귀 사상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춤과 웃음으로 삶을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춤과 웃음을 통해 어떤 사람이 자신을 극복하고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은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기술이자 삶을 유쾌하게 긍정하는 모습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 말했다 목차

제1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덕을 가르치는 강의에 대하여/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환희와 열정에 대하여/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읽기와 쓰기에 대하여/산비탈의 나무에 대하여/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시장의 파리 떼에 대하여/순결에 대하여/벗에 대하여/천 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이웃 사랑에 대하여/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독사가 문 상처에 대하여/아이와 결혼에 대하여/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베푸는 덕에 대하여

제2부
거울을 가진 아이/행복의 섬에서/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성직자들에 대하여/도덕군자들에 대하여/천민에 대하여/타란툴라에 대하여/이름 높은 현자들에 대하여/밤의 노래/춤의 노래/무덤의 노래/자기 극복에 대하여/고매한 자들에 대하여/교양의 나라에 대하여/결벽(潔癖) 성향의 인식에 대하여/학자들에 대하여/시인들에 대하여/커다란 사건에 대하여/예언자/구제에 대하여/지혜로운 대인관계에 대하여/가장 고요한 시간

제3부
방랑자/환영(幻影)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원하지 않은 행복에 대하여/해 뜨기 전에/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감람산에서/스쳐 지나감에 대하여/배신자들에 대하여
/귀향/세 가지 악에 대하여/중력의 영에 대하여/낡은 서판(書板)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치유되고 있는 자/위대한 동경에 대하여/또 다른 춤 노래/일곱 개의 봉인(封印)

제4부 – 최종부
제물로 바친 꿀/긴박한 외침/왕들과의 대화/거머리/마술사/일자리를 잃음/더없이 추악한 자/제 발로 거지가 된 자/그림자/정오에/환영 인사/만찬/차원 높은 인간에 대하여/슬픔의 노래/학문에 대하여/사막의 딸들 사이에서/일깨움/나귀 축제/밤 산책자의 노래/징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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